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쉽고 간결한 시어 속에 삶의 깊은 비의를 담보하며, 일상과 밀착된 진중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기반성의 과정을 촌철살인의 해학성과 달관의 주제의식을 통해 ‘언어의 꽃’으로 승화시킨 임영조는 삶과 시, 일상과 초월, 대상과 자아가 하나로 통합되는 시적 긴장의 순간을 가장 적확하고 예리한 붓끝으로 통찰해 온 천생 시인이다. 20년 세월을 시계추처럼 한결같이 성실한 직장인으로 살며 생활의 터전을 일구어 오면서도 그에 버금가는 충만한 시적 세계를 선보이는가 하면, 한순간 삶의 자리를 시작(詩作)의 절해고도인 ‘이소당(耳笑堂)’으로 옮겨 오로지 시 쓰기의 고행에만 온몸을 내던지기도 하는 등 임영조의 인생길은 그 자체로 인간 생활사와 자연 섭리의 표리를 두루 보듬어 안으며 풍요롭고도 염결한 시 세계를 우직하게 완성해 온 구도자의 행보였다고 평할 만하다.
그는 “누가 불러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듯/ 나 홀로 떠나는 즐거운 유배!”(<즐거운 유배>)를 자처하며 평생을 행복한 시 쓰기에 골몰했던 시인임이 분명하다. “‘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 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 손수 짜서 씌워 주는 모자 같은 것”(<시인의 모자>)이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임영조는 소박하고 튼튼한 “시인의 모자”를 바투 쓰고 그 “모자값”을 톡톡히 해 왔던 시인이다. “‘시인’이란 작위”를 평생 가슴에 달고 성실한 생활 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했던 시인 임영조, 그는 살아생전 그가 바랐던바 독자들의 마음속에 “진짜 좋은 시 한 편 얻기 위해 평생을 노심초사한 시인”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200자평
평생을 좋은 시 쓰기에 몰두하는 자세로 산 시인 임영조. 철들어 가는 인생의 과정에서 깨달은 삶의 비의들을 보편적인 소재와 친숙한 언어, 간결한 구문으로 가슴부터 울리는 노래로 승화시켜 이웃들과 나누고자 했던 그의 시를 모았다.
지은이
임영조(任永祚)는 1943년 10월 19일 충남 보령시 주산면 황율리에서 태어났으며, 주산초등학교, 주산중학교와 서울 대동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주산중학교 재학 시절, 지리 교사로 부임한 신동엽 시인으로부터 ‘기억력 좋고 글 잘 쓰는 아이’로 주목받았던 임영조는 고등학교 진학 후 ≪진달래≫, ≪한국 명시 전집≫, ≪한국 시인 전집≫ 등을 독파하면서 시에 눈뜨기 시작했고 신동엽 시인의 ‘무릎제자’가 되어 본격적인 시작(詩作) 지도를 받았다.
1965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진학 후 서정주, 박목월, 김구용, 김수영, 이형기, 함동선, 김동리, 손소희 등 한국 문단의 거장들 문하에서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았다. 군 복무 후 대전 근교의 비래사에서 6개월간 시 쓰기에만 골몰하며 30여 편의 습작시를 창작한 시인은 1970년 ≪월간문학≫ 제6회 신인상에 <出航>이,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木手의 노래>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75년 ‘육성동인(肉聲同人)’을 결성해 사화집 ≪육성(肉聲)≫ I, II를 펴냈다.
10여 년의 공백을 깨고 1985년 첫 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를 발표하며 시작 활동을 재개한 시인은 이후 ≪그림자를 지우며≫(1988), ≪갈대는 배후가 없다≫(1992), ≪귀로 웃는 집≫(1997),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2000), ≪시인의 모자≫(2003) 등의 시집과 시선집 ≪흔들리는 보리밭≫(1996),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고도를 위하여 외≫(1994)를 출판했으며, 1989년 제23회 잡지언론상(기업사보 부문), 1991년 제1회 서라벌문학상, 1993년 제38회 현대문학상, 1994년 제9회 소월시문학상, 2003년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1994년, 생업인 오랜 회사 생활을 접고 동작구 사당동에 ‘이소당(耳笑堂)’이라는 작업실을 마련해 시작과 독서에만 전념하던 시인은 여러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에서 시 창작을 지도하고 한국 시인 협회 임원으로 활동하는 등 시인으로서의 충실한 삶을 영위하다가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2003년 5월 28일 타계했다.
엮은이
윤송아(尹頌雅)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경계를 와해하는 ‘무국적자’의 레토릭-金城一紀, ≪GO≫를 중심으로->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재일조선인 문학의 주체 서사 연구≫, ≪재일코리안 문학과 조국≫(공저), ≪현경준 작품집≫(편저), ≪오유권 작품집≫(편저), ≪백두산≫(편저) 등이 있다.
차례
해동갑
≪바람이 남긴 은어≫
사십 줄 나이
꽃을 위하여
木瓜나무
안경알을 닦으며
바람의 탈
겨울나무
땡감에게
出航
木手의 노래
轉屬
斡旋
自鳴鼓·1
同行歌
≪그림자를 지우며≫
春蘭
耳鳴
詩 짓기
鳥籠을 보며
現像實技
2월
손금
파도
출타 중
蘭값이 파값보다
괄호 속에서
白磁頌
허수아비의 춤·2
시계
詩題
섬
안부
꽃辭說
蘭을 보며
여치
≪갈대는 배후가 없다≫
성냥
나무의 四季
果川別曲
自畫像
눈 오는 날에
안전선 밖에 서서
넥타이
綠茶를 끓이며
6월
손
12월
환절기
리모콘
50을 바라보며
갈대는 배후가 없다
아웃사이더 시대
知天命
염소를 찾아서·2
≪귀로 웃는 집≫
겨울 산행
도꼬마리씨 하나
익명의 스냅
매미 껍질
지네
거미
孤島를 위하여
나비
봄 산행
여름 산행
덩굴장미
벌
나팔꽃
시 읽기 1
이소당 시편 1
이소당 시편 4
이소당 시편 6
天池를 보다
직소폭포
문장대에 오르다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틈
고등어
빨래
겨울 통신
강화도 시첩 2
강화도 시첩 3
머위씨 이야기
그 섬에 가면
멀어서 아름다운 것
그대에게 가는 길 6
남해금산
즐거운 유배
신륵사 목어
방생
≪시인의 모자≫
오이도
느티나무 타불
첼로를 켜는 여자
따뜻한 등짐
석류 부처
시인의 모자
나무는 죽어서도 나무다
너무 멀리 와 있네
나의 다비는
지천명
상생의 힘
사막 3
너는 나와 다르다
풀쐐기집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
나의 새해 소망은
진짜 ‘시인’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별러도 쓰기 어려운
모자 하나 선물 받는 일이다
‘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
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
손수 짜서 씌워 주는 모자 같은 것
돈 주고도 못 사고 공짜도 없는
그 무슨 백을 써도 구할 수 없는
얼핏 보면 값싼 듯 화사한 모자
쓰고 나면 왠지 궁상맞고 멋쩍은
그러면서 따뜻한 모자 같은 것
어디서나 팔지 않는 귀한 수제품
아무나 주지 않는 꽃다발 같은
‘시인’이란 작위를 받아 보고 싶다
어쩌면 사후에도 쓸똥말똥한
시인의 모자 하나 써 보고 싶다
나의 새해 소망은.
-<시인의 모자>
●
대학 때 未堂 선생이 주신
아호에 집 堂자 붙여
近園이 써 준 ‘耳笑堂’
걸고 나니, 가가대소
누옥 한 칸이 확 넓어진다
귀가 웃는 집인가?
귀로 웃는 집인가?
잠시 엿듣다 가는 바람
코로 웃어도 상관없는 집이다
머리 어깨 힘 빼고
허파에 든 바람도 빼고
몸 가두면 들린다
시계가 내 생을 좀먹는 소리
마음벽 쩍쩍 금가는 소리
벌어진 틈 다시 메우고
어혈 든 내 혼을 방생하는 집이다
혹시 그리운 사람 올까
가끔 귀 열어 놓는다, 허나
허리 삔 바람소리 또 스산하니
문 닫고 귀로 웃는 집이다.
-<이소당 시편 1>